요정의 기사
옛날, 스코틀랜드에 거친 황무지가 있었습니다. 그 땅에는 요정의 기사가 잘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요정의 기사를 쉽게 볼 수는 없었습니다. 7년에 한 번쯤 나타났다고 하며, 사람들은 누구나 그 기사를 무서워했습니다. 그것은 나그네가 이 거친 땅을 지나가려고 들어서기만 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영영 소식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한번 사라진 사람은 아무리 찾아도 그림자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없어진 사람을 찾아 나선 사람들도, 그 이상한 기사를 만나게 될까 봐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점점 황폐해졌습니다. 그 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고, 더구나 그런 곳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 곳은 짐승들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냥꾼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백작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클레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그레고리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을 하러 다니기도 하는 친한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그레고리 백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정의 기사가 나온다는 애기를 들었는데, 그 곳에 사냥을 가보지 않겠소? 요즘 세상에 요정이니 뭐니 하는 것이 있을 리 없어요. 옛날 할머니들이, 어린 아이들이 히스 풀 숲에 들어가서 길이라도 잃게 될까 걱정해서 만든 이야기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 같은 어른들이 그런 애기 때문에 즐거운 사냥을 못 한다는 건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오.”
그러나 클레어 백작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위험한 곳에 들어가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들어선 사람이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나 역시 그 곳에 사냥을 못 가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어요. 클로버 잎을 몸에 지니면, 요정의 기사가 어떤 마술의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 힘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세 잎 클로버는 신을 나타낸 거라니까요. 우리도 세 잎 클로버를 몸에 지니고 그 땅에 한번 들어가 봅시다.“
이 말을 듣고 그레고리 백작은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나를 어린 애로 생각하시오? 클로버 잎이 사람을 보호해준다는 얘기 따위를 내가 믿을 것 같소? 정 그렇다면 당신은 클로버 잎을 몸에 지니고 가시오. 나는 이 활과 화살을 믿겠소.”
그래도 클레어 백작은, 어릴 때 그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들으려 했습니다.
“클로버 잎을 몸에 지닌 사람은 마귀 여자와 요정과 악마들의 저주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클레어 백작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클레어 백작은 목장으로 가 클로버 잎을 하나 따서 그것을 팔에 붙이고, 엷은 비단 수건으로 잡아맸습니다. 그러고는 그레고리 백작과 나란히 말을 달려 쓸쓸한 황무지로 들어갔습니다.
4,5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두 사람은 사냥에 정신이 팔려 무서운 생각도 잊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똑같이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겁에 질린 얼굴로 한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말을 탄 한 사람이 두 백작의 앞쪽을 가로질러 간 것입니다. 어디서 온 누구일까 궁금해 하다가 그레고리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 말은 매우 빨리 달리고 있었소. 이 세상의 말이라면 우리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없지 않소? 그 말을 뒤쫓아 가서 대체 어디서 온 누구인지 알아봅시다.”
그러나 클레어 백작은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천만에! 저 말을 따라 갈순 없소. 저건 요정의 기사입니다. 보지 않았소? 그 말은 딸에 발이 닿지 않고 공중을 날아갔소. 그건 사람이 타는 보통 말이 아니라 날개로 나는 말이오. 그런 말을 따라갔다가는 무슨 변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요정의 기사 생각만 하더니 당신은 정신이 이상해 진거요. 그건 확실히 훌륭한 기사였소. 초록빛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탔었소. 나는 그 훌륭한 기사에게 마음이 끌려 그 분을 만나고 싶어 못 견디겠소. 나는 그를 따라가 보겠소. 이 세상 끝까지라도······.”
그레고리 백작은 곧 말을 몰아, 이상한 기사가 간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혼자 남은 클레어 백작은
“아! 그레고리가 악마에 씌었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큰일이 날거야.”
하고 그레고리의 뒤를 따라 급히 말을 달렸습니다.
한편, 간신히 초록빛 옷의 기사를 찾은 그레고리는 시내를 건너고 늪을 지나 이제껏 보지 못한 험한 곳에 이르렀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은 얼굴같이 차고, 발 밑의 시든 풀잎에는 서리가 하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레고리는 이상하고도 무서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땅 위에 커다란 둥근 테가 울타리처럼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테 안에는 새파란 풀이 우거지고, 몇 백이나 되는 유령같은 요정들이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요정들은 모두 환히 비치는 엷은 옥색의 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 얇은 옷이 요정들의 몸을 휘감기도 하고, 물결처럼 흔들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푸른 연기가 감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요정들은 춤을 추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두 손을 머리 위에 얹기도 하고, 땅바닥에 뒹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요정들이 그레고리가 와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레고리는 둥근 테 밖에 서 있었습니다. 요정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레고리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어서 와요. 함께 춤추면, 나중에 임금님의 술을 드리겠어요.”
하고 꾀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레고리는 그 요정들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 요정들 가운데에서 나이 많은 한 악마가 그레고리 옆으로 다가오더니, 둥근 테 가까이에서 허리를 굽히고 속삭였습니다.
“기사여, 만일 당신의 목숨을 아끼려거든 이 테 안으로 들어오지 마시오. 우리들 사이에 끼이기만 하면, 당신은 일생을 망치게 될 것이오.”
그레고리는 이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나는 저 초록빛 옷을 입은 기사를 따르려고 합니다. 죽음의 나라까지라도 따라갈 것을 맹세합니다.”
말을 마친 그레고리는 둥근 테 안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레고리가 요정들 틈에 끼이자, 요정들은 더욱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춤을 추었습니다. 한참 그러다가 갑자기 노래와 춤을 뚝 그치고, 요정들은 양편으로 갈라지며 한가운데로 길을 냈습니다. 요정들은 그레고리에게 한 가운데로 나아가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레고리가 한 복판으로 나서자, 거기에는 대리석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한 기사가 앉아있었습니다. 그 기사야말로 그레고리가 여기까지 뒤쫓아온 바로 그 기사였습니다. 기사의 테이블에는 훌륭한 술잔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술잔은 녹색 보석인 에메랄드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술잔 가장자리는 빨간 루비를 빙 둘러 박았습니다. 그 잔에는 히스로 만든 술이 넘칠 듯이 담겨 있었습니다.
초록빛 옷의 기사가 그레고리에게 그 술잔을 권했습니다. 그레고리는 마침 목이 말랐던 참이라, 주는 대로 받아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잔의 술은 마셔도 마셔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레고리도 그제야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히 쓸데없는 모험을 했구나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레고리의 팔다리가 저려 오고, 몸에 이상한 경련이 일며 차차 온 몸이 굳어졌습니다. 얼굴도 파랗게 질렸습니다. 살려 달라는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습니다. 손에 쥐었던 술잔이 툭 떨어지는 순간, 그레고리는 요정의 왕 앞에 픽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요정들은 ‘와아’하고 기쁨에 찬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을 꾀어들여 이렇게 만드는 것을 요정들은 매우 즐거운 일거리로 삼았습니다.
요정들이 떠드는 소리가 차차 가라앉더니, 무언가 소곤소곤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겁에 질린 듯한 빛이 떠돌았습니다. 그것은 요정들의 밝은 귀가 무서운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로, 요정들은 그 발자국 소리가 저주를 받지 않은 사람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요정들은 그런 사람을 무서워했습니다.
이윽고 클레어 백작이 나타났습니다. 백작이 요정들이 춤추던 곳의 둥근 테를 넘어 들어오려고 하자, 나이 많은 악마가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 또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군요. 당신도 처자가 있다면 빨리 되돌아가시오.”
“너는 무어냐? 어디서 온 누구지?”
클레어 백작은 부드러운 눈으로 작은 악마에게 물었습니다.
“나도 당신네 나라에서 왔습니다. 나도 전에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황무지를 지나다가 초록빛 기사로 변한 요정 왕의 마술의 걸려 이 곳에서 히스 술을 마시고는. 7년 동안 꼼짝 못하게 되었습니다. 백작님, 당신 친구도 지금 마술에 걸려 쓰러져 있습니다.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겠지만, 그 때는 나와 같은 꼴이 되고 맙니다.”
말을 다 듣고 난 클레어 백작이 물었습니다.
“내 친구가 요정이 되기 전에 구해 낼 방법이 없을까? 나는 요정 왕의 마술 따위는 두렵지 않다. 요정 왕보다 더 장한 신의 표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니까. 어서 말해 다오. 저 친구를 구해낼 방법이 없단 말이냐?”
“백작님,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서리 속에서 날이 새도록 꼼짝하지 않고 서 있어야 합니다. 교회당의 새벽 종 소리가 들릴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야만 해요. 그리고 아침이 되면 이 둥근 마술의 네 언저리를 천천히 아홉 바퀴 돌아야 합니다. 그러고는 테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있는 히스 술잔을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러는 동안 한 마디라도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은 단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늪입니다. 이 밑에는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는데, 만일 말을 하게 되면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립니다.”
늙은 악마는 이렇게 일러 주고 요정들 사이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클레어 백작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찬 바람과 어둠 속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온몸이 꽁꽁 얼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윽고 아침이 되어 먼 데서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려 왔습니다. 그러자 요정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클레어 백작은 천천히 둥근 테를 돌기 시작했습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아홉 바퀴를 다 돌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요정들이 성난 소리를 질렀는데, 그것은 마치 먼데서 들려오는 우렛소리 같았습니다. 클레어 백작은 자기가 서있는 땅이 불쑥 솟아올랐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클레어 백작을 흔들어 땅 속으로 떨어뜨리려는 것 같았습니다.
클레어 백작은 마술의 테를 넘어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요정들이 조그만 얼음 조각같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백작은 대리석 테이블 앞으로 갔습니다.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요정의 왕도 굳어 있었고, 그 옆에 쓰러져 있는 그레고리 백작의 몸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까마귀 두 마리가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까마귀는 에메랄드 술잔을 지키려는 듯 가끔 날개를 파닥거렸습니다.
“까옥까옥.”
“까옥까옥.”
클레어 백작은 에메랄드 술잔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두 마리의 까마귀가 휙 날아오르더니 괴상한 소리로 울며, 클레어 백작의 머리 위를 빙빙 돌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술잔을 도로 뺏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요정의 왕과 요정들도 눈을 뜨고 일어나 클레어 백작에게 손은 대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클로버 잎을 몸에 지닌 클레어 백작은 신의 보호를 받아 무사했습니다.
마술의 자리에서 돌아온 클레어 백작은 소름이 끼칠 만큼 기분 나쁜 마귀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얼어 있는 요정들도 끼익끼익 소리를 질렀고, 늪에서는 괴물이 윙윙 소리를 냈습니다. 용감한 클레어 백작은 그런 소리에 놀라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술잔을 둥근 테 밖으로 가지고 나왔습니다.
교회당의 종소리가 맑은 아침 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습니다. 클레어 백작은 술잔을 땅바닥에 탁 내던졌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술잔이 깨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요정들도 요정의 왕도 대리석 테이블과 함께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다만 풀 위에 그레고리 백작만이 혼자 누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레고리 백작은 천천히 마술에서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팔다리를 움직이더니 부스스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러고는 이상하다는 듯이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마치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 클레어 백작이 달려가 그레고리 백작을 끌어안자, 그레고리 백장의 몸에 피가 돌고 손발이 제대로 움직였습니다.
두사람은 클레어 백작이 깨뜨려 버린 마술 술잔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깨진 술잔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이슬에 젖은 잿빛 돌멩이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동화]
[세계 문학] 요정의 기사
2026. 1. 24. 00:22
